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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영식
제목 홍영식
작성자 김은우 (ip:)
  • 작성일 2015-02-01 14: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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郵便의 아버지, 琴石 洪英植 선생

김 승 제

http://www.woopyo.net/phila/img/hong.jpg홍영식 선생은 1855 12 29, 후에 영의정을 지낸 아버지 홍순목(洪淳穆)과 어머니 전주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홍순목은 아들 홍만식(洪萬植)이 있었으나 백부 홍순경(洪淳敬)이 후사가 없이 죽자 1849년 양자로 입적되었고, 1853년에 상처를 하게 되어 재취를 하여 얻은 아들이 바로 홍영식 선생이다

선생의 어린 시절은 어머니를 일찍 여의어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음에도 16세였던 1872 7월 칠석제에서 대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아버지 홍순목은 관직을 맡기에는 아직 어리다고 판단하여 국왕에게 주청하여 2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독서당에서 공부하는 제도)가 허가되었고,사가를 마친 선생은 고종의 총애가 있었던 듯 1878 3 9일 교리(校理, 5 - 5급 사무관), 1878 11 29일 문학(文學, 4 - 3급 부이사관), 1880 8 9일 상례(相禮, 3 - 2급 이사관), 1880 12월 참의(參議, 당상관 - 1급 관리관)로 승진하는 등 출세가도를 달리게 되었다.
선생이 개화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오래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할 때 선생도 이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당시 시찰대상이 병제였으나 우편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
그것은 일본 우편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마에지마의 자서전인 『우편창업담』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
그 후 명치 13(1880)으로 기억되는데, 조선에서 정치상의 시찰원을 일본에 파견해 왔다. 그 가운데 홍영식이라는 사람이 있어 역체국에 찾아와서 우편에 관한 일들을 질문하므로 나는 모든 서류를 증여하고 직원으로 하여금 그 실무를 설명시키고 자신도 홍씨와 만나 우편의 요의를 말하고, (조선에도) 빨리 우편을 개설할 것을 권고하고, 더욱이 중국에 우편시설이 없음은 유감된 일이나 귀국은 중국을 사부로 삼고 매사 중국에 따르는 형편이므로 우편도 언제 생길지 모를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행히 오늘 그대의 질문이 있음은 그 개설의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믿어진다. 이는 실로 경하할 일이라고 말했더니 홍씨도 크게 감격하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홍씨의 질문 가운데 일본이 조선으로 보내는 우편세를 내국세와 동액으로 정한 이유가 무엇이냐고 정색을 하고 물었다. 나는 이에 대하여 별다른 이유는 없다, 후일 조선에도 우편이 개설되어 교환조약이 맺어지면 각각 그 나라의 내국세를 받게 되므로 그 합산된 액을 표준하여 세액을 정하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더니, 홍씨도 양해하고 안심하는 눈치였다."
여기에서 한가지 더 주목해야 될 대목은 조선행 우편요금에 대한 선생의 날카로운 지적을 통해 일본이 부산에 설치한 일본재외우편국에 대하여 사전에 충분한 지식을 가졌음을 알 수 있고, 더더구나 그들의 흑심을 미리 간파하여 마에지마의 아픈 곳을 찔렀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선생은 우편에 대한 관심이 많았던 관계로 1882 12 4일 새로 발족한 교섭통상아문(交涉通商衙門)에 근대식 체신기관의 효시인 우정사(郵程司)가 설치될 때 담당 협판이 되었고, 1883 9월 보빙부사(報聘副使)로 미국에 간 선생은 뉴욕의 우체국과 전신국을 시찰하였으며, 귀국후 고종에게 복명하면서 우편 개설이 급선무라고 대답하였던 점을 보아서 미국 시찰시에 확신을 얻었던 것 같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결국 1884 3 27(양력 4 22) 우정총국을 창설하게 되었고, 선생이 우정국총판에 임명되었으며, 10 1(양력 11 18) 서울·인천 간에 근대식 우편제도가 실시되었으나 10 17일에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패로 19일 향년 30세의 나이로 청군에 의해 살해당하면서 어렵게 실시하게 된 근대우편제도도 10 21 20일만에 중단하게 되었다.
근대우편제도를 창설한 선생에 대해서 건방지다는 평도 있는데 특히, 매천 황현 선생은 『매천야록』에 다음과 같이 선생을 혹독하게 폄하하고 있다.

홍영식의 영민(梅泉野錄 卷之一上, 甲午以前)
홍영식은 영상 홍순목의 아들로 참판 홍만식의 배다른 아우이다. 그는 경박하고 영민하여 그가 말한 시무(時務)는 들을만하였지만 홍순목은 그를 매우 우려하여 가정을 보존하지 못할 아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경박한 그의 친구들은 그를 찾아 다니며 「중육」, 「중육」하고 그의 자를 불렀다. 그는 일찍이 한림학사로 있다가 아경(亞卿)이 되었다.

박영효 등의 미국 왕환往還(梅泉野錄 卷之一上, 甲午以前)
갑신년(1884) , 전권대신 박영효, 부관 홍영식, 종사관 서광범 등이 미국에서 돌아왔다.
[
중략]
그리고 홍영식은 가선(嘉善)으로 승진시키고, 대교(待敎) 서광범은 동부승지로 특진시켰으며, 김옥균도 참판을 제수하였다.
[
중략]
그리고 홍영식은 사절로 갔다 온 후, 그의 아버지를 뵈온 지 이미 1년이 지났었다. 그가 대궐로 나갈 때 그의 부친 홍순목이 빈청에 있었으나 그는 입시만 하고 물러나와 빈청을 들리지 않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는 관서 이승오가 집을 판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 때 이승오는 상중에 있었지만 홍영식은 조문을 하지 않았다. 그는 그 집을 소개한 사람을 따라 이승오의 집에 갔다. 홍영식은 홑두루마기를 입은 채 손을 뒤로 하고, 그의 집을 들어가 처마만 둘러보고 나왔다. 이승오에게 조문도 하지 않고 돌아간 것이다.
우리 풍속에 대체로 남에게 조문할 사람은 하얀 도포를 입지만 조문을 하지 않을 사람은 그의 집을 들어가지 않는다.
이 때 나는 한성에 있으면서 경향(經香) 한장석을 찾아 보았다. 경향은 손가락을 꼽아가며 서재필과 홍영식의 하는 일을 말해 주면서 "윤리가 없어졌으니 나라가 망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탄식을 그치지 않았다.
선생의 혁명은 자신이 살해 당하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가족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1884 11 1(양력 12 17) 부친 홍순목과 형 홍만식은 모든 관직에서 삭탈되어 이날 부친 홍순목의 명령에 의해 선생의 일가 20여명은 독약을 받고 집단 자살하고, 본인은 마지막으로 자택 대들보에 목을 매고 자살하였다.
또한 혁명을 일으키기 전에 이미 시집을 보낸 선생의 질녀에게까지 시련을 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야기가 있어 소개한다.

미셀닷컴 우취도서관 자료인용 (저자:김승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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